여러분은 명품 브랜드 하면 어떤 회사가 떠오르시나요? 아마 오늘 살펴볼 기업의 브랜드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요. 오늘은 다양한 명품 기업 중, 개성 있는 철학과 역동적인 스토리를 갖고 있는 CHANEL(샤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샤넬의 설립자인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은 1883년 프랑스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12살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샤넬을 수녀원에 버렸습니다. 그렇게 수녀원에서 생계를 위해 바느질을 배운 샤넬은 성인이 되자 수녀원을 나가 봉제회사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샤넬은 가수를 꿈꾸며,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뮤직홀의 가수로 활동했습니다. 보조 가수로 시작한 그녀는 점차 인기를 끌었고, 당시 자주 불렀던 노래 <Ko Ko Ri Ko>와 <Qui qu'a vu Coco dans le Trocadero>에서 '코코'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그렇게 생활하던 1907년, 샤넬은 기마대 장교로 복무하던 '에튀엥느 발장'이라는 사람과 교제하고 있었는데요. 그녀는 잠시 예능계의 길을 접고, 파리 근교에 있는 발장의 별장에서 머물며 모자를 만들어서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몸매가 드러나는 귀부인 풍의 화려한 드레스나 치렁치렁한 스타일의 모자가 유행했는데, 샤넬은 작고 심플한 모자를 판매했습니다.
발장과 헤어진 샤넬은 보다 넓은 시장에서 모자를 판매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마침 새로 교제한 영국의 청년사업가 '아서 카펠'이 개업 자금을 후원해주었고, 샤넬은 샤넬 모드(CHANEL MODE)라는 이름의 첫 매장을 깡봉가 21번지에 오픈했습니다. 수수하고 간편한 샤넬의 모자는 개업 초기에 상류층 부르주아 여성들에게 외면당했지만, 당시 유명한 연극배우가 자신의 연극에 샤넬의 모자를 착용하면서 매장은 점차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샤넬의 능력을 알아본 카펠은 1912년 도빌(Deauville)이라는 휴양지에 새로운 가게를 열어주었습니다. 휴양지에서 사람들이 의류를 더 많이 구입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인데요. 그렇게 샤넬은 '가브리엘 샤넬'이라는 이름의 부티크를 오픈했고, 샤넬의 옷은 휴가에서 편안하면서도 예쁜 옷을 찾던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또한 머지않아 발발한 세계 1차 대전은 샤넬이 유럽에 명성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계 1차 대전으로 인해 피난 온 유럽 각국의 귀족들에게 샤넬이라는 브랜드를 알리게 된 것인데요. 당시 남자들이 전쟁에 나가면서 여성들이 사회생활을 많이 하기 시작했는데, 실용적이고 단순한 디자인을 추구하던 샤넬의 옷이 보다 각광받았던 것입니다. 이후 명성을 얻은 샤넬은 1918년에 파리 패션의 중심지였던 깡봉가 31번지에 진출할 정도로 승승장구했지만, 아쉽게도 그녀와 교제하던 카펠은 1919년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1921년, 샤넬은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와 함께 샤넬의 첫 향수인 'No.5'를 발표합니다. 보가 준비했던 10가지 시제품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다섯 번째 제품을 고르고 이름을 붙인 것인데요. 샤넬의 No.5는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향수이며,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C를 겹쳐 만든 로고도 당시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죠.
샤넬은 당시 대량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상승하는 수요에 비해 제품을 많이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인데요. 어느 날 이를 알던 파리의 유명한 백화점 사장이 샤넬을 찾아와서 부르주아 화장품 재벌이던 '피에르 베르타이머'를 소개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24년에 샤넬 이름의 주인인 가브리엘 샤넬,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 그리고 피에르 베르타이머가 같이 회사를 설립하며, CHANEL은 다양한 제품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샤넬은 이후 액세서리 부문의 공장을 개설하고, 양장 전문점을 오픈하는 등 순탄하게 성장해왔습니다. 1939년에는 약 4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기업이 되기도 했죠. 그러나 노동인권 부족에 대한 항의로 파업 투쟁이 벌어지고,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며 샤넬은 향수랑 액세서리를 제외한 모든 매장의 문을 닫았습니다.
전쟁 후 상황은 샤넬에게 더욱 치명적이었습니다. 전쟁 당시 샤넬은 13살 연하의 나치 독일 외교관 '폰 딘클라게'랑 교제하고 있었는데, 2차 대전이 끝나자 나치 독일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연행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간신히 연행은 면했지만, 나치 독일과의 관계가 문제 되면서 그녀는 프랑스 밖으로 쫓겨나다시피 했습니다. 그렇게 샤넬은 스위스로 건너갔고, 왕좌는 디올에게 넘어갔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디올을 중심으로 화려한 디자인이 패션계를 장악하고 있는 모습을 본 샤넬은 패션계에 복귀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잠시 지분 문제로 다투었지만 화해한 동업자 베르타이머 지원을 받아, 샤넬은 17년 만인 1954년 파리 패션쇼에 복귀합니다. 당시 샤넬의 나이는 71살이었죠.
그러나 프랑스와 유럽의 반응은 참담했습니다. 여전히 유럽은 전쟁의 아픔이 강하게 남아있었고, 샤넬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회는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왔는데요. 바로 미국에서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미국은 샤넬의 과거에 큰 관심이 없었고, 미국의 고급 상점가에서는 샤넬의 옷들을 주문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각종 미국 언론의 호평과 할리우드 스타들의 선택을 받으며, 샤넬은 새로운 전성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1971년, 샤넬은 83살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경쟁자이자 동업자이던 피에르 베르타이머도 죽었고, 그의 아들은 사업에 관심이 없었죠. 그렇게 샤넬은 코코 샤넬의 사망 이후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피에르 베르타이머의 손자인 '알랭 베르타이머'가 25살의 나이에 경영권을 잡았는데, 다행히 그는 사업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알랭은 새로운 경영진을 영입하였고, 바로 이때 '칼 라거펠트'가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로 등장했습니다.
칼 라거펠트는 샤넬을 만든 코코 샤넬의 스타일에 트렌디함을 더해서 샤넬을 성공적으로 부활시켰습니다. 라거펠트를 통해 샤넬의 상징과도 같던 우아한 트위드 재킷은 젊은 층까지 사로잡는 경쾌한 스타일로 변신했고, ‘C’ 두 개가 겹쳐 있는 샤넬의 트레이드마크를 의상이나 가방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 역시 라거펠트였습니다. 라거펠트는 죽은 샤넬을 환생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1983년에 부임한 이후 37년 동안 롱런하며 샤넬을 이끌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명품 시장은 꾸준히 상승해 왔습니다. 샤넬의 매출 역시 코로나의 타격을 받은 2020년을 제외하면 나름 꾸준한 상승 그래프를 보여주고 있죠. 그럼에도 일부 분석가들은 샤넬이 다른 명품 기업보다 상대적으로 실적이 부진하다고 말하는데요. 아쉬운 실적의 원인으로는 보수적인 디지털 판매 전략과 클래식 모델의 부재가 꼽힙니다. 샤넬이 다른 명품 기업에 비해 온라인 판매에 인색하고, ‘샤넬 2.55’와 ‘클래식 플립백’을 제외한 별다른 클래식 모델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샤넬의 전략에 대해 몇몇 전문가는 샤넬이 에르메스와 같은 보다 높은 명품 포지션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샤넬은 최근 들어 다른 기업보다 큰 폭으로 제품 가격을 인상하였고, 일부 제품은 2019년 대비 최대 두 배 이상 비싸지기도 했죠.
오늘은 대표적인 명품 기업인 샤넬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상장되어 있지 않은 회사라서 분석하기에 재무적인 정보가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역동적인 역사를 갖고 있는 재미있는 기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의 이야기를 듣고 샤넬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들으셨을지도 궁금하네요!
참고자료
- 일사에프 유튜브
- 샤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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